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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김부장은 IPA맥주를 닮았다.

트랜스포터 2019년 7월 2일 78

김부장은 IPA맥주를 닮았다.

※ 본 기사는 2019년 1월에 발행된 트랜스포터 3호의 컨텐츠입니다.


내 나이 28세. 광고 회사에 다니는 지극히 평범한 3년차 직장인이다. 생각해 보니 우습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평범함이 그토록 바라던 특별함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뿌듯해서 집에서부터 목에 걸고 다니던 사원증이 지금은 나를 회사에 묶어두는 목줄 같이 느껴지고, 점심식사 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이제 하루를 버티기 위해 들이키는 카페인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년간 파릇파릇 프레쉬했던 많은 것들이 칙칙하게 변했다.

아..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내 앞에서 썩은 카푸치노의 거품 같은 휘핑을 양쪽 입술 끝에 올려가며 실적에 대해 아침부터 목청을 높이는 우리 팀장 김 부장은 3년 동안 변함이 없다. 어쩜 저렇게 한결같은지. 그가 좋아하는 IPA맥주를 닮았다.

IPA(Indian Pale Ale)란, 냉장 시스템이 없던 대영제국 시대에 영국에서 생산된 맥주를 배에 실어 인도까지 운반할 때, 뜨거운 적도의 열기에도 맥주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맥주의 주원료 중 하나인, 천연 방부제 ‘홉’을 대량으로 첨가한 맥주 스타일이다.

김 부장의 일에 대한 깐깐함은 결코 변함이 없다. 한편으로는 독하다는 생각이,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일에 대한 프레시한 열정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대영제국 시절, 맥주의 보관기간을 늘리기 위해서 홉을 많이 넣어서 만든 IPA맥주
*출처 : [www.straighttothepint.com]
맥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홉, 맥주의 향과 쓴맛 그리고 천연 방부제 역할 등을 한다.

신입사원 때 맥주의 ‘맥’ 자도 모르던 나에게 IPA맥주를 먹였던 사람도 바로 저 김 부장이었다. 당시 입사 후 첫 팀 회식 때였다. 1차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회식을 하자며 2차로 데려간 곳이 난생처음 가본 대형 맥주 펍이었다. 맥주 종류가 어찌나 이리도 많고, 또 맥주 한 잔 가격이 어찌나 비싼지, 웬만한 설렁탕 한 그릇 값을 웃돌았다. 이런 게 직장인, 아니 법카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제야 비로소 내가 진짜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그 비싼 맥주를 한 사람당 한 잔씩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00cc짜리 맥주 피쳐를 낑낑대며 돌려 따라마시던 가난한 대학생에게 이런 럭셔리한 음주 문화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다.

메뉴판을 이리저리 둘러 보면서 어떤 맥주를 고를까 신나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김 부장은 나에게 IPA 맥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IPA가 수입 맥주의 브랜드 이름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셔본 적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부장을 비롯한 선배들은 알 수 없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우리 막내 오늘 맥주의 신세계를 열어줘야겠구먼” 하며 인디카 IPA 생맥주를 주문해줬다.

주문한 맥주가 나오고 각자 한 잔씩 주문한 맥주잔을 들고 다 같이 건배를 했다. 한 점으로 둘러 모인 맥주는 참 가지각색이었다. 평소에 보던 투명한 황금빛부터 붉은색, 검은색, 내가 주문한 탁한 주황빛 맥주까지.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조금 들뜬 호흡을 가라 앉히고 내가 주문한 맥주를 입 근처로 가져다 댄 순간, 아까 살짝 봤던 김 부장의 회심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화장품 냄새가 났다.
‘맥주에 누가 장난을 쳐놓은 것은 아닐까’
‘상한 건가? 아니 맥주도 상하나?’
‘1차에서 폭탄주를 먹이지 않고 이제서야 환영주를 주는 건가?’
하는 별에 별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래도 이상하다는 티를 내어 찍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맥주를 꿀떡꿀떡 들이켰다. 약 3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코끝에 맥주를 가져갔을 때 순간적으로 들었던 내 생각 중의 상당 부분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굉장히 쓰고, 향이 강했다.

4년 전, 참 찌질했던 전 남친이 사준 싸구려 립스틱을 갈아서 넣은 것 같은 향이 났다. 연신 구겨진 내 표정을 보고 김 부장을 비롯한 우리 팀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이미 나의 표정을 예상했다는 듯이 웃었다. 폭소도 아니었고 실소도 아닌 딱 그 중간 정도의 장난기 머금은 웃음이 여전히 기억에 난다.

“막내야 이 맥주 맛이 좋다고 느껴지게 되면, 그제야 직장인의 쓴 맛 단 맛을 이해하게 되는 거다”


오전 마케팅 실적 보고 미팅이 지속되고 있다. 김 부장의 피드백을 듣고 있자니 그날 먹었던 인디카 IPA의 맛이 입안을 돈다. 정말 희한할 정도로 정확하게. 다만, 지금은 그 맛이 향긋하게 느껴지고, 그 향에 반응하여 입 안에 침이 고인다는 점이 사뭇 다르다. 생각해보니 달라진 것은 나였다. 회사도 김 부장도 그대로이다.

김 부장은 확실히 IPA 스타일의 맥주를 닮았다.

그 옛날, 맥주가 상하거나 맛이 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연방부제인 홉을 가득 넣어 인도로 수출하던 영국의 그 맥주. 그래서 독특한 향과 쓰디 쓴 맛을 가진, 홉의 특징이 강한 맥주로 변신한 IPA. 김 부장이 그렇다. 그가 좋아하는 IPA스타일 맥주를 많이 마신 탓일까. 자신의 색과 향이 확실하며 일에 대해서 독할 정도로 끈질기다. 그리고 그가 내뿜는 색과 향이, 그의 쓰디쓴 독설이, 그렇게 적응하기 힘들던 김 부장의 특징들이, 시간이 지나자 점점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팀 실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점점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에게도 처음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독특한 쓴맛이, 향이, 색깔이.

대신에 당시 그를 채웠던 것은 2년 전의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프레시함이었을 것이다. 나도 IPA 맥주를 많이 마시게 되면 그처럼 진하고 쓰디 쓴 사람이 되어,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나 자신을 오랫동안 버티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될까?
오늘은 퇴근 후에 진하고 쓴 더블 IPA를 잔뜩 마셔야겠다.


김 부장은 확실히 IPA를 닮았다.

By. 고첼. 맥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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