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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코로나19와 크래프트노포

트랜스포터 2021년 2월 1일 356

※ 본 컨텐츠는 맥주잡지 트랜스포터 11호(2021년 겨울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사진 및 글을 포함한 모든 컨텐츠에 대한 저작권/소유권은 ‘맥주잡지 트랜스포터’에 있으며, 무단 전재, 배포를 금합니다.

[11호] 코로나19와 크래프트노포

사진 제공 : eummihada

2020년 11월 4일, 영국에서는 2차 ‘락다운(Lock-down)’이 시작됐다. 락다운 기간에는 슈퍼마켓과 약국을 제외한 음식점, 카페, 술집과 미용실 등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아야 한다. 영국에 거주하는 필자는 이미 반 년째 재택근무 중이고, 입장 인원이 정해져 있는 탓에 슈퍼마켓 앞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쓰고 줄 서는게 일상이 되었지만, 코로나19 는 수그러들 줄 모르고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다. 매일 만 명 이상의 환자와 수백명의 사망자가 쏟아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만은 허용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이로 인해 환자가 폭증할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나왔을 정도로 올겨울은 유독 춥고 어둡다.

락다운으로 오프라인 소비 활동이 멈춰버렸지만, 그래도 일부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사정은 나쁘지 않다. 일찍부터 마트 판매를 시작한 브루독(Brewdog) 같은 경우에는 코로나로 인해 홈술이 늘면서 펍에서의 손실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곰표 맥주’, ‘유미 맥주’, ‘말표 맥주’ 같이 편의점에 진출한 국내 크래프트 맥주가 선전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또한, 영국에서는 주류 온라인 판매도 자유로우므로 굳이 슈퍼마켓을 통하지 않더라도 브루어리 홈페이지에서 맥주를 주문하여 택배로 받아볼 수 있다. 소규모 브루어리라도 캔이나 병맥주만 생산할 수 있다면 직접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캐스크(Cask) 맥주’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진짜 영국 맥주’의 위기

캐스크 맥주는 발효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효모를 거르지 않은 채 ‘캐스크’라고 불리는 통에 담아 파는 맥주를 말한다. 흔히 우리가 생맥주라고 부르는 맥주는 밀폐된 ‘케그(KEG)’라는 통에 담아 보관하고 서빙할 때 이산화탄소를 주입해 거품을 만드는 반면 캐스크 맥주는 생막걸리처럼 효모가 발효 과정에서 자연스레 탄산을 만들어낸다. 펍에서 판매하는 동안에도 계속 발효가 진행되기 때문에 맛이 부드럽고 풍부하지만 시간에 따른 변화가 심해 유통기한이 짧다. 영국에서만 만들어지고, 영국에서만 마시는 ‘진짜 영국 맥주’이다.

지난 5월 서둘러 시작된 첫 번째 락다운으로 캐스크 펍이 문을 닫으면서 약 7천만 잔(!)의 캐스크 맥주가 버려졌다고 한다. 일부 맥주는 증류해 손 세정제로 재탄생하기도 했지만, 평소 세금 정산이나 환경 오염 등의 이유로 까다로운 심사가 필요했던 맥주 폐기 과정이 손쉽게 바뀌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맥주가 목구멍 대신 수챗구멍으로 사라져버렸다.

유난히 짧았던 여름이 지난 후, 이번에도 단 5일의  준비 기간을 두고 두 번째 락다운이 시작됐다. 지난 경험 때문인지 락다운이 발표되자마자 캐스크 맥주 한 잔에 1파운드 (약 1,500원)에 파는 세일이 시작됐다. 어차피 락다운이 시작되면 버려야 하니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팔아보려는 것이다. 마치 편의점에서는 국산 크래프트 맥주가 대유행이지만 이 행렬에 동참하지 못한 수많은 소규모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위기에 처한 한국과 매우 비슷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캐스크 맥주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도 있다. 지난 2008년의 경험 덕분이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로 외식이 크게 줄어 캐스크 펍에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집에서 요리를 해 먹으며 음식과 건강에 관심을 가지는 소비자가 늘어났고, 자연스레 효모가 살아있는 맥주인 캐스크 맥주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대기업 맥주보다는 비싸지만, 캐스크 맥주를 소확행 상품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2009년부터는 오히려 캐스크 맥주 붐이 일었다는 것이다.

펍은 영국의 ‘노포’다

이런 자신감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영국 특유의 ‘펍 문화’이다. 런던 같은 대도시는 덜하지만, 작은 도시에는 백 년 이상을 버틴 건물에 자리한 펍이 수두룩하다. 한국처럼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은 점차 인구가 줄고 있는데, 펍만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우체국이나 마을 회관의 역할까지 겸할 정도로 영국의 펍은 마을의 구심점이다. 집을 고르는 기준 중 하나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마음에 드는 펍이 있는지’를 꼽을 정도로 영국인의 펍 사랑은 각별하다. 펍과 캐스크 맥주를 사랑하는 만큼 소비자와 브루어리간의 유대도 강하다. 주로 캐스크 맥주를 생산하는 라콘 (Lacons) 브루어리는 코로나19가 사라지면 다시 펍을 방문하겠다는 의미의 #payItBackAtThePump 해시태그를 달면 판매처가 사라져 폐기해야 하는 캐스크 맥주 한 통을 무료로 배송해주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영국의 펍에는 단순히 한 세대를 뛰어넘는 수백 년의 역사가 있다. 하지만 현재의 캐스크 맥주와 펍은 70년대 영국의 젊은 세대와 함께 성장하고 늙어가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최신 설비에서 대량 생산한 라거 맥주에 캐스크 맥주가 밀려나던 시절, 효모가 살아있는 ‘진짜 영국 맥주’가 사라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네 명의 친구가 모여 1971년 결성한 ‘캄라(CAMRA; CAMpaign for Real Ale)’는 이들 세대 맥주 문화의 상징이다. 좋은 캐스크 맥주와 펍을 홍보하고, 다양한 캐스크 맥주가 생산, 유통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이뤄내는 등 가장 성공한 소비자 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캄라는 현재 약 10만여 명의 회원과 함께하고 있다. 비록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수많은 캐스크 펍이 사라지고 있고 코로나로 인해 가속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캄라와 캐스크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지킬 수 있었던 펍 또한 많다. 이렇게 지켜낸 공간은 그들과 함께 늙어가며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자신을 반겨주는 펍에서 캐스크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삶을 만들어냈다. 영국의 펍은 최첨단 유행은 아니지만, 언제나 편안하게 찾아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노포’이다.

지금의 크래프트, 미래의 노포

도시,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조금만 장사가 잘되면 치솟는 임대료에 수십 년은 커녕 수년간 한 자리를 지키는 가게를 찾기 쉽지 않은 것이 한국의 상황이다. 하지만 세련된 새 건물과 새로운 가게를 선호하던 과거와 달리 투박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버텨낸 노포에 관심을 두는 소비자도 늘어나고 있다. 노가리와 생맥주로 가성비 최강 조합을 보여주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과 과거엔 사라져도 상관없는 낡은 가게로 치부되었을 한 냉면집의 철거 예정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와 관심을 보냈던 것처럼 말이다.

한국에 크래프트 맥주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지금 크래프트 맥주는 최신 유행에 가깝다. 하지만 크래프트 펍이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늙어간다면 수십 년 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줄 노포가 될 것이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동네 크래프트 펍을 바라보면서도 젊은 사람들이 싫어한다며 선뜻 들어가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내 삶의 한 조각이 담긴 오래된 가게 몇 개가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울 수 있겠다고 느꼈다. 좋은 학군이나 역세권보다도 나의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책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동네 서점, 언제든 부담 없이 기분 전환할 수 있는 동네 카페, 그리고 편안하게 한 잔의 맥주를 홀짝일 수 있는 동네 펍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격상되고 해제되기를 반복하며 많은 이들을 걱정스럽게 하고 있는 요즘, 미래 우리 세대의 노포가 될 크래프트 펍을 지킬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어차피 주말은 집에서 보내야 한다면, 평소 좋아하던 펍이나 보틀샵에 전화해 맥주 테이크 아웃이 가능한지 물어보자. 조금 번거롭더라도 매장에 방문해 이런저런 맥주를 주문해 보자. 이번 기회에 평소 소장하고 있는 그라울러를 사용하면 더 좋다. 거리 두기로 한가해진 주말 시간은 테이크 아웃한 맥주와 함께해 보자. 조금 번거롭더라도, 조금 귀찮더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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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음미하다 @eummihada

어릴 때 제사나 명절에 어른들이 한 잔씩 따라주시던 음복주의 씁쓸하지만 달콤한 그 맛과 즐겁게 마시던 분위기, 적당히 취기가 오르던 나른한 오후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크래프트 맥주 열풍이 한창이던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천여 가지 맥주를 맛본 생물학자와 일러스트레이터가 맥주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맥주도 취미가 될 수 있나요’를 썼습니다. 우리의 크래프트 맥주가 우리의 음식과 문화가 되어, 맥주를 좋아하는 모든 이들이 당당하게 ‘나는 맥주가 취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맥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삶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가 보려고 합니다.


<맥주잡지 트랜스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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